일생에서 ‘소중한 가족’의 탄생만큼 감격스럽고 감사한 순간이 또 있을까요? 지난 61년간 차병원에서는 40만명의 신생아가 태어났고, 차병원 난임센터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1시간에 1명의 태아가 잉태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차병원과 인연을 맺으며, 감동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데요. <차병원과 우리가족> 코너에서는 차병원의 인술을 통해 단란한 가정을 이루거나, 건강한 삶을 되찾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3년은 그렇게 흘렀다. 심지어 배아를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을 결제하지도 않았다. 병원에서 연락이 올 때면 “곧 방문하겠다”고만 답하고 다시 수면 아래로 기억을 감추었다.
그러면서 남편과 나는 ‘욜로(YOLO)’의 삶을 즐겼다. ‘인생은 오직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인 것마냥 즐기던 것을 즐기고 즐길 만한 것을 찾아 다녔다. 좋아하던 영화를 실컷 보고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맛있는 요리를 잔뜩 만들어 친구들을 불러 모아 즐기고, 프랑스 남부 지역을 훑으며 여행했다. 일본이며 중국, 홍콩 같은 여행지를 마음껏 드나들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미국 중서부 지역을 3주 동안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부부는 욜로(YOLO)의 삶을 즐기고자 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아이가 있으면 이렇게 못 하잖아?”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우리의 선택이, 사실은 미룬 것이지만,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래서 미국 여행 중 받은 전화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그간 보관료를 결제하라는 전화를 받을 때 함께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3년간 미뤄왔던 문제를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지부터 얘기를 해야 했고 왜 가져야 하는지, 언제까지 노력할 것인지 말하다 보면 우리는 왜 차병원 서울역센터에서 냉동되어 있는 배아를 외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올 법했다
확실히, 우리는 모른 척 해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아이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두 개의 배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척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배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아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아이처럼 대하고 싶다가도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클 때는 그저 세포일 뿐 일별하고 싶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미국 몬타나주에서 캐나다에 걸쳐 있는 거대한 국립공원, 글레이셔 국립공원을 탐방하고 나서 있었던 일이었다. 유독 글레이셔 국립공원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는데 개중에는 갓난 아기를 앞으로 안아 메고 하이킹을 떠난 가족이 있었다. 쨍한 여름에도 녹지 않은 눈길을 걸으며 아이에게 도란도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은, 나는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그 이유를 찾기 힘들었지만 꽤나 강해서,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을 질투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김효정·홍성윤 부부는 3년 전 차병원 서울역센터에 냉동해놓았던
배아를 이식해 쌍둥이 남매를 얻었다.
남편은 사실 아이가 있는 삶을 조금씩 그리고 있었다. 최소한 병원에 남아 있는 배아들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의 주체가 남편이 아닌 나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한적한 미국의 국도변 식당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딱히 서로에게 화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3년간 쌓아온 말이 그렇게 많았다.
“왜 아이를 갖고 싶은지, 아이들 갖는 것이 좋을 것인지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의견은 모아졌다.
차병원 서울역센터에 남아 있는 냉동 배아를 이식해 보기로 결정했다.
”
3년 만에 찾은 병원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무표정하지만 간절하게 앉아 있는 환자들부터 조곤조곤 친절하게 알려주는 간호사들까지. 불안하고 불안정한 마음을 다독여준 것은 3년 전과 같이 웃는 얼굴로 맞아준 궁미경 교수였다. 궁미경 교수는 마치 치과 치료를 미뤄 놓은 환자처럼 머뭇거리며 찾아간 첫 번째 진료 시간에 ‘다시 잘 왔다’고 다독여줬다. 단호하게 “이번에도 난자 채취를 해보고 냉동 배아를 이식하는 걸로 합시다” 결론을 내려 주었다.
안타깝게도 아마도 더욱 악화된 난소 기능 때문에 조기 배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난자는 채취하지 못했다. 그것도 꽤나 낙심할 만한 일이었다. 채취된 난자로 배아를 만들어 확률을 좀 더 높이려던 바람이 꺾였기 때문이었다. 반쯤은 포기한 채로 배아 이식날을 맞았다.
궁미경 교수는 지난 세 번의 시험관에서처럼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내 두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기도하지 않는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신실한 기도가 눈물이 흐르게 했다. 시린 코끝을 억지로 훔치며 누워 누군가에게 빌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면, 부디 마음이 원하는 결론이 내려지기를.”
”
그게 2019년 12월의 어느 화요일이었다. 11일 뒤 연말 기분이 느껴지는 토요일, 남편과 나는 이른 오전 시간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향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채혈을 하고 난 뒤였다. 피검사 결과가 나오는 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워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관을 나와 브런치를 먹으러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대강 허기를 채우고 커피를 마시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에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 일곱 번의 피검사 결과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 들렸다. 착상이 된 것 같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날 남편과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임신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느냐는 남편의 질문에 “글쎄. 우는건 너무 뻔한데”라고 웃어 넘겼었는데 실제로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그때서야 내가 임신을 원하고 있었고,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신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토록 기다린 아이가 찾아왔을 때
부부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해가 바뀌기 이틀 전 12월 30일에는 아기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병원 서울역센터의 초음파실은 난임 시술을 받는 환자와 임신을 확인하려는 환자들이 섞여 초음파를 보는 곳이다. 자연히 남편의 출입이 제한적인데 아기집을 확인하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설레는 마음으로 누워 아기집을 확인하는 나에게 의사가 말했다. “여기 아기집이 하나, 둘. 두 개가 있네요.” 현실감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다가오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봤다. “쌍둥이래.”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복잡하게 웃었다. 확실히 기뻤다. 3년을 내리 기다린 두 아이는 모두 뱃속에 잘 자리 잡았다. 그제야 오랜 시간 기다리게 만들었던 배아가 세포가 아니라 ‘아이’라는 사실이 시리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우려스러웠다. 쌍둥이 임신과 출산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때가 무색하게 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떨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조금 심한 입덧을 겪고, 기형아 검사며 임신당뇨증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하루가 다르게 불러가는 배를 붙잡으며 비로소 우리 가족이 남편과 나, 두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성별도 알게 되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남매였다. 두 아이를 데리고 바다를 보러 갔다. 벚꽃이 내려 앉는 바다 위 언덕에서 다음에는 두 손 잡고 함께 오자고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걸었다. 베이비페어에도 들렀다. 유모차를 사고 카시트를 장만했다. 아이들의 배냇저고리를 마련하고 아기 침대를 골랐다. 주변 사람들의 고마운 축하를 받으며 만삭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출산일을 맞았다.
비가 무척 많이 오던 그 해 여름, 특히 더 많은 비가 내리던 한여름 날. 새벽부터 쏟아지던 비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대에 누워 웅크려 하반신을 마취시키는 주사를 맞고는 떨리는 몸을 붙잡아 천장을 쳐다봤다.
둔중한 감각이 느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울음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임신 기간 9개월 내내 상상했었다. 처음 아이를 만나면 보여줄 표정과 전해줄 말을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자 눈앞이 흐려져, 수술대에 묶인 두 손으로는 눈물을 걷어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저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길게 트여진 눈매만 보여 “안녕” 한 마디를 하고 한참을 흐느꼈다. 머리맡에 서 있던 의료진이 눈물을 닦아주는 와중에 둘째 아이를 만났다. “엄마야” 한 마디 더 하고는 흐려진 눈을 끔벅였다. 아이를 씻기고 몸무게를 재며 “정말 예쁘네” 간호사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또 울었다. 째낸 하반신을 꿰매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쌍둥이 남매가 돌이 되었을 때 찍은 김효정·홍성윤 부부네 가족 사진
가끔 되짚어볼 때가 있다. 그 때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지루한 강변북로의 교통 정체, 조용히 진료 차례를 기다리던 서늘한 대기실의 풍경, 이식 후 누워서 바라보던 회복실의 천장, 주말 점심 브런치 집에서 울리던 전화벨 소리, 처음 본 두 개의 아기집. 그리고 아이들을 한껏 꼭 안고서는 볼을 갖다 댄다. 그린듯이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기억 속에 덧씌워진다.
남편 홍성윤씨는 임신 기간 동안 매일 아내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기록했다.
색을 넣은 부분은 가장 특별했던 순간이 담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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